역사속에 빛난 인물 >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1897~1944)
일사각오(一死覺梧)의 순교자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산정현 교회의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신앙의 선열이다. 특별히 일제의 탄압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하였다. 1897년 11월 25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눈병으로 중퇴하고 1926년 장로회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말기 궁성 요배를 비롯하여, 국민 시 낭송, 일본 신사참배 등을 정면으로 규탄 반대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당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였다.
산정현교회 시무시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자 일사각오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 앞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이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梧)만 있을 뿐입니다."
목사 파면의 위협 속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40년 7월 다섯 번째 검 속되어 황실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옥 중 음식에 병이 들어 병감으로 옮겨진 후 1주일 만에 그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수감돼 있었던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49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국가에서는 1968년 7월 9일 애국선열의 한 사람으로 후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해를 안장시켰다.
소양 주기철 목사 약력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년 3월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년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년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년 3월 23일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년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년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년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년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년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년 4월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년 10월 25일
장남 영진 출생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년 11월 5일
차남 영만 출생
1922년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년 1월 9일
3남 영묵 출생
1925년 2월 22일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년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년 11월 13일
4남 영해 출생
1928년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년
3남 영묵 병사
1929년
경남노회에서 주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년 3월 5일
장녀 영덕 출생
1905년 4월 13일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년 7월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년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년 3월 18일
4남 광조 출생
1933년 5월 16일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년 8월
부친 주현성장로 별세(향년81세)
1935년 5월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년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날 "일사각오" 설교
1936년
주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년 7월
평양산정현교회 부임
1937년 9월 5일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년 2월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당함
1938년 6월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년 6월 30일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년 8월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의성 농우회 사건에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년 2월 4일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년 2월 5일
평양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년 9월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년 12월 19일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년 3월 24일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년 4월
주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년 여름
제4차 검속
1941년 8월 25일
1944년 3월 31일
1944년 4월 21일
1944년 4월 25일
1947년 1월 27일
1950년 9월
1990년 12월 21일
1997년 4월 20일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당함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오후 4시 주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주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주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주목사 복권 및 복적